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제목
‘○○○ 파경….’ 이혼이나 이별을 알리는 기사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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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자
onion
등록일
2025-04-10
조회수
1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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‘○○○ 파경….’ 이혼이나 이별을 알리는 기사 ‘○○○ 파경….’ 이혼이나 이별을 알리는 기사 제목에 즐겨 등장하는 용어가 ‘파경(破鏡)’이다.거울이 깨졌으니 돌이킬 수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.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. 왜냐면 ‘파경’에는 ‘중원(重圓·다시 원을 이룸)’이 붙어 ‘파경중원(破鏡重圓)’, 즉 ‘이별(파경) 후 재회(중원)’가 본뜻이기 때문이다.2017년 경북 경산 하양읍 양지리의 널무덤 주인공 가슴 위에서 출토된 명문 청동거울. 명문이 ‘군망망(君忘忘~)’으로 시작되어 ‘군망망경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. 최근들어 지병으로 떠나보낸 남편을 사랑한 나머지 ‘아직 그대를 놓아줄 수 없다’고 애끊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남편의 가슴에 고이 올려놓은 청동거울이라는 새로운 해석이 나왔다.|국립대구박물관·국립청주박물관·국립나주박물관 제공■파경=이별과 재회<태평어람>(938년 편찬)은 <신이경>(기원전 132년 편찬)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.“옛날 어떤 부부가 부득이 떨어져 있게 되자 거울을 깨뜨려(破鏡) 각기 반씩 나누어 징표로 삼았다. 그러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사통하자 그 깨진 거울이 까치가 되어 남편에게 날아가 일러바쳤다.”(‘파경’)‘깨진 거울(鏡·경)이 까치(鵲·작)가 되어(化·화) 날아갔다(飛·비)’는 ‘경화작비(鏡化鵲飛)’는 ‘돌이킬 수 없는 이별’을 가리킨다.<태평광기>(978년 편찬)에는 이별 후 재회, 즉 ‘파경중원’의 기사가 보인다. 즉 남조 진(陳·557~589)의 관리였던 서덕언은 수나라군이 쳐들어오자 청동거울을 반으로 잘라 부인과 나눠 가지며 재회의 증표로 삼았다.양지리 출토 명문거울 중 한 점은 주인공의 가슴 위를 덮은 부채 자루 밑에 곱게 놓여있었다. 지름 17.4㎝나 되는 이 거울은 한반도 남부 출토품 가운데 가장 큰 한경, 즉 중국 한나라제 거울이다.|국립청주박물관 제공“해마다 정월 대보름날이 되면 이걸(거울 반쪽)을 장안(長安·도읍) 시장에 내다 파시오. 내가 살아있다면 반드시 찾아가겠소.”결국 진나라는 멸망했고, 서덕언의 부인은 수나라 개국공신인 양소(?~606)의 노예로 끌려갔다. 부인은 양소의 첩이 되어 총애를 받게 됐다.양지리 출토 명문 청동거울을 두고 처음 판독은 ‘한탄도 하지 못하고…슬픔에 지쳐 마음의 고통을 호소할 수 없어 우울할 수밖에…사세를 알면 오래 머물러서는 안되지만 자신의 일관된 마음은 항상 제거되지 않는다’는 것이었다. |이양수 국립청주박물관장 설명그런 줄도 모르고 간신히 목숨을 보전한 남편(서덕언)은 장안으로 올라와 정월 대보름에 시장을 찾았다. 과연 어떤 이가 ‘○○○ 파경….’ 이혼이나 이별을 알리는 기사 제목에 즐겨 등장하는 용어가 ‘파경(破鏡)’이다.거울이 깨졌으니 돌이킬 수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.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. 왜냐면 ‘파경’에는 ‘중원(重圓·다시 원을 이룸)’이 붙어 ‘파경중원(破鏡重圓)’, 즉 ‘이별(파경) 후 재회(중원)’가 본뜻이기 때문이다.2017년 경북 경산 하양읍 양지리의 널무덤 주인공 가슴 위에서 출토된 명문 청동거울. 명문이 ‘군망망(君忘忘~)’으로 시작되어 ‘군망망경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. 최근들어 지병으로 떠나보낸 남편을 사랑한 나머지 ‘아직 그대를 놓아줄 수 없다’고 애끊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남편의 가슴에 고이 올려놓은 청동거울이라는 새로운 해석이 나왔다.|국립대구박물관·국립청주박물관·국립나주박물관 제공■파경=이별과 재회<태평어람>(938년 편찬)은 <신이경>(기원전 132년 편찬)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.“옛날 어떤 부부가 부득이 떨어져 있게 되자 거울을 깨뜨려(破鏡) 각기 반씩 나누어 징표로 삼았다. 그러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사통하자 그 깨진 거울이 까치가 되어 남편에게 날아가 일러바쳤다.”(‘파경’)‘깨진 거울(鏡·경)이 까치(鵲·작)가 되어(化·화) 날아갔다(飛·비)’는 ‘경화작비(鏡化鵲飛)’는 ‘돌이킬 수 없는 이별’을 가리킨다.<태평광기>(978년 편찬)에는 이별 후 재회, 즉 ‘파경중원’의 기사가 보인다. 즉 남조 진(陳·557~589)의 관리였던 서덕언은 수나라군이 쳐들어오자 청동거울을 반으로 잘라 부인과 나눠 가지며 재회의 증표로 삼았다.양지리 출토 명문거울 중 한 점은 주인공의 가슴 위를 덮은 부채 자루 밑에 곱게 놓여있었다. 지름 17.4㎝나 되는 이 거울은 한반도 남부 출토품 가운데 가장 큰 한경, 즉 중국 한나라제 거울이다.|국립청주박물관 제공“해마다 정월 대보름날이 되면 이걸(거울 반쪽)을 장안(長安·도읍) 시장에 내다 파시오. 내가 살아있다면 반드시 찾아가겠소.”결국 진나라는 멸망했고, 서덕언의 부인은 수나라 개국공신인 양소(?~606)의 노예로 끌려갔다. 부인은 양소의 첩이 되어 총애를 받게 됐다.양지리 출토 ‘○○○ 파경….’ 이혼이나 이별을 알리는 기사